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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묵상

[매일성경 묵상] 누가복음 23:26 - 23:43 억지로 십자가를 진 사람

by 아직은여름 2025.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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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언덕에서 드러난 구원의 얼굴

누가복음 23장 26절부터 43절은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을 향해 걸어가시는 장면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고 두 행악자와 함께 나눈 대화까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육체적 고통을 넘어서 영적 구원의 메시지를 깊이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따르며, 누가는 단지 사건의 기록을 넘어서, 죄인과 여인들, 그리고 마지막 회심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의 반응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를 선명히 드러냅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진 사람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하신 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나아가십니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과 피로로 인해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로마 군인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불러 대신 지게 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라가게 하더라"(26절)

여기서 '붙들어'라는 단어는 헬라어 'ἐπιλαμβάνομαι(epilambanomai)'로, 단순히 요청하거나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붙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몬은 자신의 의지로가 아니라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 억지의 순간을 통해 시몬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초대교회 전승에 따르면 이 시몬은 훗날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의 아들 루포는 로마서 16:13에 등장하는 인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억지로 시작된 동행이 은혜의 동참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억지 같아 보이는 부르심이 결국 구원과 연결되는 신비입니다.

울며 따르는 여인들에게

이어지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슬피 울며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예상과 다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절)

'돌이켜'라는 단어는 헬라어 'στραφεὶς(strapheis)'로, 단순히 몸을 돌린 것이 아니라 마음을 두고 대면하는 시선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들의 감정적인 반응을 넘어선 통찰을 요청하십니다. 단순한 동정은 구원을 낳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보다 이 고난을 만들어낸 세상의 죄, 그로 인해 닥칠 심판에 대해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30절에 언급된 표현은 호세아 10:8을 인용한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사람들이 산에게 무너지라고 요청할 만큼의 공포와 절망을 상징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이 단지 인간적 비극이 아니라,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는 자리임을 알려줍니다. 청교도 존 오웬은 인간이 죄를 가볍게 여기는 만큼 십자가는 무의미해진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고난의 무게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합니다.

십자가 위의 구원 사건

마침내 예수님은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누가는 매우 절제된 언어로 이 장면을 묘사하지만, 그 안에는 구속사의 절정이 담겨 있습니다. 33절은 단순히 "그들이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라고 기록합니다. 헬라어 'ἐσταύρωσαν(estaurōsan)'은 '십자가에 못 박다'는 단어로,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사형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 고통보다 그리스도의 반응을 강조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34절)

이 기도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향해 용서를 구하십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이 구절을 두고 "하나님의 정의는 십자가 위에서 가장 완전한 자비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죄인이 회개하기 전에 먼저 용서를 선언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그 자체로 구원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은 또한 십자가 아래에서 제비 뽑아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병사들의 무감각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지도자들과 병사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35-36절)라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구원은 조롱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조용히 성취되는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확증은 두 행악자의 대조를 통해 드러납니다. 한 사람은 예수를 모욕하며 말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 이는 진심이 아닌, 자신의 고통을 면하려는 욕망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행악자는 그를 꾸짖으며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41절)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무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42절)라고 간청합니다. 이 고백은 그리스도를 단지 고난받는 자로가 아니라, 왕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이 간청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헬라어 'παράδεισος(paradeisos)'는 낙원, 즉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된 구원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이라는 즉각적 시제를 사용하십니다. 이는 죽음 이후 바로 주와 함께 있게 되는 은혜의 확실성을 보여줍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 장면을 두고 "이 한 마디가 죄인의 영혼을 낙원으로 옮기는 사다리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무리

누가복음 23장 26절부터 43절까지의 본문은 십자가라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 인간의 죄와 회개,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놀랍게 보여주는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진 자도, 울며 따르던 여인들도, 조롱하던 군중도, 심지어 십자가에 달린 강도조차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구원의 이야기 안에 위치하게 됩니다.

이 본문은 단지 감정적인 슬픔을 자아내는 장면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한마디의 은혜가 얼마나 큰 구원을 이루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억지로 동행한 시몬입니까, 감정에 머문 여인들입니까, 침묵한 병사들입니까, 회개한 행악자입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구든 이 십자가 앞에 서면, 그 은혜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그 자리에서 이 고백을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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