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성경묵상

[매일성경 묵상] 누가복음 24:1 - 24:12 부활의 아침

by 아직은여름 2025. 4. 14.
반응형

돌이 굴려진 그 새벽, 믿음은 다시 시작되었다

누가복음 24장 1절부터 12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게 되는 첫 순간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이른 새벽, 여인들이 준비한 향품을 들고 무덤을 찾았을 때, 그들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분이 사라진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시체가 사라진 놀라운 사건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이며, 믿음의 새로운 시작점이 되는 역사적 선언입니다. 무덤의 빈 공간은 절망이 아닌 생명의 가능성을 여는 문이 됩니다.

빈 무덤과 굴려진 돌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1절) 누가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도 끝까지 따랐던 여인들의 헌신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랐고, 그의 장례를 끝까지 지켜본 자들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가장 먼저 무덤을 찾습니다. 이들의 사랑과 헌신은 주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하는 은혜로 연결됩니다.

2절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라고 말합니다. ‘굴려 옮겨진’은 헬라어로 ‘ἀποκυλίω(apokyliō)’이며, 이는 단순히 돌이 옆으로 치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막고 있던 장벽이 제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돌은 단지 육체적 무게가 아니라, 죽음과 절망, 인간의 이해를 가로막고 있던 모든 장벽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돌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치워졌다는 사실은 부활이 인간의 노력이나 논리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개입임을 보여줍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들어가지만, 주 예수의 시신은 보이지 않습니다(3절). 이는 무덤이 열렸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가신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살아 계시기에 열려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인간이 그분을 찾을 수 있도록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입니다.

두 천사의 메시지와 기억의 회복

여인들이 놀라며 당황하고 있을 때,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나타납니다(4절). 이는 부활의 증언자로서의 천사들의 역할을 보여줍니다. ‘빛나는 옷’은 헬라어로 ‘ἀστραπτουσῶν(astraptousōn)’이며, 번개처럼 번쩍이는 광휘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상징하며, 인간 세계에 속하지 않은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천사들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절) 이 질문은 단지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의 방향을 되돌리는 영적 각성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자’라는 표현은 헬라어 ‘ζῶντα(zōnta)’로,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분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과거형의 존재가 아닌 현재형의 주님이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6절) 여기서 ‘기억하다’는 ‘μνησθῆτε(mnēsthēte)’로, 단순한 회상이 아닌 믿음의 재구성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단지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기반한 현재의 삶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님이 반드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셋째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예언의 성취를 상기시키는 내용입니다(7절). 그제서야 여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8절). 이 장면은 성령의 내적 조명 없이 인간은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는 진리를 드러냅니다. 교부 어거스틴은 “기억은 진리의 성전이며, 성령은 그 안에서 말씀을 다시 꺼내어 보여주시는 분”이라 했습니다.

믿기 어려운 소식 앞에서

여인들은 무덤에서 돌아와 제자들에게 이 모든 일을 알립니다. 그들은 단지 감정적 충격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천사들의 말씀을 통한 명확한 복음의 메시지를 증언합니다(9절). 그들은 사도들에게 이 사건을 전하지만, 사도들은 그 말을 ‘허탄한 듯이 여깁니다’(11절). 헬라어 ‘λῆρος(lēros)’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헛소리라는 뜻으로, 제자들의 내면에 얼마나 강한 회의와 상실감이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려가 무덤으로 향합니다. 그는 무덤 안에 놓인 세마포만 보고 이상히 여기며 돌아갑니다(12절). ‘이상히 여기다’는 헬라어 ‘θαυμάζω(thaumazō)’는 단지 놀라움이 아닌, 경외와 인식의 확장을 수반하는 감정입니다. 베드로는 아직 모든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그 경험을 통해 신앙의 새로운 전환점에 서게 됩니다.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는 부활 신앙에 대해 “믿지 못할 만큼 놀랍고, 놀랄 만큼 진실한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초기 제자들의 반응은 믿음 없는 자들의 비난이 아닌, 진실한 인간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그들은 점차 복음의 실체에 이끌려가며, 부활의 증인으로 변화됩니다.

마무리

누가복음 24장 1절부터 12절은 부활의 아침, 하나님께서 돌을 굴리심으로 열어주신 새로운 세계의 서막을 보여줍니다. 그 세계는 더 이상 죽음이 지배하지 않는 공간이며, 기억과 말씀, 그리고 믿음이 다시 회복되는 자리입니다. 무덤은 비어 있었지만, 그 속은 허무가 아니라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날 새벽, 여인들은 죽음을 마주하러 갔으나, 생명을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여전히 허탄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부활의 새벽은 단지 하나의 기적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를 위한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계신 주님을 찾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말씀을 잊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복음을 허탄하게 여기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베드로처럼 다시 무덤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돌이 굴려진 그 새벽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는 그 굴려진 돌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빈 무덤 속에서 부활의 생명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은 다시 시작되고, 우리의 삶은 다시 살아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