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숨을 거두신 그 날, 성소는 열렸다
누가복음 23장 44절부터 56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는 장면과 그 이후의 장례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한 종교적 순교가 아닌,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중심 사건임을 드러냅니다. 죽음이라는 가장 절망스러운 사건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문이 열리고 있음을 이 구절은 조용하지만 분명히 선포합니다.
어둠과 휘장, 그리고 마지막 호흡
44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며” 이는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지속된 비정상적인 어둠을 의미합니다. 헬라어 ‘ἐσκοτίσθη’(eskotisthē)는 수동태로 ‘어두워졌다’는 뜻인데, 자연현상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는 출애굽기에서 애굽에 임했던 어둠의 재앙을 떠올리게 하며, 심판의 전조이자 창조질서의 전복을 상징합니다.
45절은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덧붙이지만, 누가는 ‘가운데로’ 찢어졌다고 강조합니다. ‘휘장’은 헬라어 ‘καταπέτασμα’(katapetasma)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막이며,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던 상징물이었습니다. 그것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인간이 제사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6절에서 예수님은 큰 소리로 외쳐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는 시편 31편 5절을 인용한 것으로, 경건한 유대인들이 죽음을 앞두고 자주 암송하던 구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에 ‘아버지’라는 단어를 덧붙이십니다. 이는 단순한 신의 의탁이 아니라, 친밀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헬라어 ‘παρατίθεμαι’(paratithemai)는 ‘위탁하다, 맡기다’는 뜻으로,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넘긴다는 전적인 신뢰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순종과 신뢰 속에서 맞이하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여기서 ‘숨지다’는 헬라어 ‘ἐξέπνευσεν’(exepneusen)으로, 단순히 호흡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영을 내어보내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죽음을 ‘영을 내어주심’으로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죽음은 그분에게 강제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백부장의 고백과 백성들의 반응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던 로마 백부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합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47절) 헬라어 ‘δίκαιος’(dikaios)는 ‘의롭다, 정당하다’는 의미로, 예수님의 무죄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였음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이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는 대조되는 반응이며, 이방인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복음의 확장을 암시합니다.
군중들의 반응도 묘사됩니다.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48절) 여기서 ‘가슴을 치다’는 표현은 후회와 애통의 표현이며, 헬라어 ‘τύπτοντες’(typtontes)는 반복적 행동을 뜻합니다. 이는 감정적인 반응 이상의 내면적 충격과 회개의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하지만 회개로까지 이어졌는지는 본문이 침묵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진리 앞에서 인간의 양심이 흔들리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언급됩니다. 49절에는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이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십자가를 지지는 못했지만, 그분을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멀리서’라는 표현은 그들의 물리적 거리이자 심리적 두려움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용기를 말없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요셉의 결단과 무명의 헌신
50절 이후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등장을 통해 장례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는 공회원이었지만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개되며,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로 묘사됩니다. 이는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산헤드린의 결정에 동조하지 않았던 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음을 뜻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51절)였습니다. 이 표현은 마가복음에서 요셉의 경건한 신앙을 드러내는 구절로도 등장합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담대히 예수님의 시신을 요청합니다. 이는 단순한 호의나 정서적 동정이 아니라, 사회적, 종교적 불이익을 무릅쓴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받아, 세마포에 싸서 아직 사람이 묻힌 일이 없는 무덤에 모십니다. 이 무덤은 바위 속에 판 것이며, 이는 당시 부유층이 소유하던 장례시설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무덤이 요셉 자신의 것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즉, 요셉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 공간을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 모습은 주님을 위한 헌신이 단지 마음의 결단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희생을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54절에서 누가는 그 날이 ‘준비일’이며,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고 기록합니다. 시간의 촉박함 속에서도 예수님의 장례는 정결하고 신중하게 진행됩니다. 55절에서는 예수를 따라왔던 여자들이 요셉이 행한 것을 보고 무덤과 시신이 놓인 자리를 주의 깊게 살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56절에서 그들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고 안식일에는 계명에 따라 쉬었다고 기록됩니다. 이는 유대인의 전통과 계명을 존중하는 신앙적 태도이자, 예수님께 드릴 마지막 사랑의 행위로 준비된 순종입니다.
청교도 매튜 헨리는 이 장면을 주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늦지 않는다. 사람의 시간에는 장례지만, 하나님의 시간에는 부활을 위한 무대이다.” 그 말처럼 이 조용한 장례 준비는 곧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는 전야의 모습이었습니다.
마무리
누가복음 23장 44절부터 56절까지는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복음의 중심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고통의 절정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이 열리는 시점이었습니다. 어둠은 빛을 가리려 했지만, 오히려 그 어둠 속에서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장벽은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셨고, 그 죽음은 단순한 종료가 아닌, 생명을 향한 위탁의 시작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의인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했고, 백성은 가슴을 치며 돌아갔으며, 제자들은 멀리서도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용기 있게 신앙의 결단을 행했고, 여인들은 사랑으로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를 되묻게 합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자리에 있는지, 숨죽이며 향품을 준비하는 이들처럼 작은 헌신으로 동참하고 있는지, 혹은 요셉처럼 침묵 속에 용기를 품고 결단하고 있는지. 주님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결코 방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그분이 숨을 거두신 그 날을 기억하며, 다시 휘장 너머로 열린 은혜의 길을 따라 들어가야 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며, 조용한 무덤은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이 준비되는 곳임을 믿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다시 일으킵니다. 그리고 곧 다가올 부활의 새벽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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