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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묵상

[매일성경 묵상] 누가복음 22:24 - 22:38 제자들의 다툼과 예수님의 대답

by 아직은여름 2025.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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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앞둔 제자들과 주님의 마음

누가복음 22장 24절부터 38절까지는 예수님의 수난 전날 밤,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교훈의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성만찬 직후,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크고자 하는 다툼, 그에 대한 예수님의 겸손의 가르침,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시는 말씀, 그리고 제자들에게 닥칠 고난에 대비하라는 경고까지, 이 본문은 예수님의 깊은 마음과 제자들의 인간적 연약함이 교차하는 신비한 긴장감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의 다툼과 예수님의 대답

성만찬을 마친 후,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 22:24) 이 다툼은 매우 아이러니한 장면입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눈 거룩한 식사 자리 직후, 그들은 서로 누가 더 크냐며 세속적인 욕망을 드러냅니다. 헬라어로 '다툼이 났다'는 표현은 'φιλονεικία(philoneikia)', 즉 '자기 주장을 앞세워 싸우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내면의 자아가 드러나는 격렬한 경쟁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그 다툼을 책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25-26절) 주님은 세상의 권력 구조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대조하십니다. 세상에서는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가 큰 자로 여겨지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여기서 '섬기는 자'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διάκονος(diakonos)'로, 이는 본래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것보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이웃을 돌보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교회를 향한 근본적 질서를 세우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청교도 토마스 왓슨은 "섬김 없는 위대함은 사탄의 위대함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주님의 겸손한 본과 제자들을 향한 약속

예수님은 단지 가르치시는 것으로 멈추지 않으시고, 자신의 삶을 통해 본을 보이십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27절) 이 말씀은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사역의 정수를 요약하는 말입니다. 헬라어로 '있노라'는 현재 시제로 사용되어, 예수님의 섬김이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29절) 여기서 '맡기다'는 헬라어 'διατίθεμαι(diatithemai)'는 유언적 계약을 세우는 행위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 받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영광의 약속이지만, 그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전제하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정치적 승리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나라에서 제자들이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종말론적 영광에 대한 약속으로, 제자들의 현재의 연약함과는 대조되는 미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지금 그들이 연약하고 실수하고 있지만,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시몬아,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예수님은 갑자기 시몬 베드로를 지목하시며 그에게 경고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31절) 여기서 '밀 까부르다'는 표현은 헬라어 'σινιάζω(siniazō)'로, 곡식 알갱이를 체로 흔들어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이는 매우 강한 시험과 시련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너희를'이라는 복수가 사용된 것입니다. 즉, 이 시험은 베드로 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2절) 이 말씀은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보여주는 귀한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중보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33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예고하십니다.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34절) 이 말씀은 인간의 자기 확신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줍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의지는 죄로 인해 왜곡되었기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어떤 선한 결단도 온전히 지켜낼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충성을 맹세했지만, 결국 두려움 앞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칼을 차라, 이제는 싸움의 때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전환점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전대나 배낭이나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제자들이 없었다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36절)

이 말씀은 복음 사역의 방식이 이제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급하셨지만, 이제는 고난과 핍박의 때가 올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검'은 단순한 무기를 뜻하기보다, 박해의 시대에 대비하라는 상징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교부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무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자신이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으리라" 하십니다. 이는 메시아가 고난받는 종으로서 십자가를 짊어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라고 반응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결합니다. "좋하다." 이는 수긍이 아니라,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음을 뜻하는 단호한 종결입니다. 그들의 인식의 한계 속에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결론

누가복음 22장 24절부터 38절은 겸손, 연약함, 그리고 다가오는 영적 전쟁에 대한 대비라는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세속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고 있었고, 그들의 마음에는 경쟁과 불안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섬김의 길을 가르치시고, 자신의 고난과 그 의미를 다시 설명하십니다.

이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강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누가 크냐를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섬김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성공과 인정으로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우리는 또한 베드로처럼 결단하지만, 두려움 앞에서 무너질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돌이킨 후에는 다른 이들을 붙들라고 부탁하십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앙의 여정은 늘 평탄하지 않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때로는 칼을 차야 하는 영적 전쟁의 시기가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시기에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당신의 십자가 길을 끝까지 완수하십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섬기며 견디며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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