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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묵상

[매일성경 묵상] 누가복음 22:1 - 22:23

by 아직은여름 2025.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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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과 잔 사이, 배신과 은혜의 밤

누가복음 22장 1절부터 23절은 유월절을 맞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유월절과 성만찬의 신학적 의미, 예수님의 겸손한 준비, 그리고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가 교차하는 밤의 이야기입니다. 이 장면은 성만찬의 제정뿐 아니라, 죄인과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도의 자아 성찰을 이끌어내는 신비로운 진리를 품고 있습니다.

  1. 유월절을 준비하다 (1-6절)
  2. 성만찬을 제정하시다 (7-20절)
  3. 배신을 예고하시다 (21-23절)

유월절을 준비하다

누가는 예수님의 수난을 유월절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로, 무교절과 함께 지켜졌습니다. 이 절기는 단순한 민족의 해방을 넘어서 하나님의 구속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시간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이 시점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궁리합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합니다. 예수를 향한 민중의 관심은 여전했고, 그들의 시기심은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계획은 인간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 정확히 들어맞고 있습니다.

특히 3절,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라는 구절은 무겁고 깊은 신학적 여운을 남깁니다. '들어가니'는 헬라어 'εἰσέρχομαι(eiserchomai)'로, 물리적으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한 유혹을 넘어서 유다의 마음을 사탄이 사로잡았다는 뜻입니다. 어거스틴은 유다가 탐욕이라는 문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사탄이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즉, 사탄은 허용된 문을 통해 역사합니다.

그리고 유다는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모의합니다. 6절은 "그들이 기뻐하며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약하다'는 헬라어 'συντίθεμαι(syntithemai)'는 상업적 계약을 맺는 행위로, 유다는 예수를 인격이 아닌 거래의 대상으로 취급합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선택입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이 모든 과정조차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의 일부로 삼으십니다.

성만찬을 제정하시다

예수님은 유월절 음식이 준비되자, 열두 제자와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시기 위해 자리를 정합니다. 15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여기서 '원하고 원하였노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ἐπιθυμίᾳ ἐπεθύμησα(epithymia epethymēsa)'인데, 반복된 동사는 감정의 강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둔 그 시점에도,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나누는 일을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마지막 만남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깊은 기대와 소망이 담긴 표현입니다.

이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은 떡과 잔을 들어 축사하시고 나눠주시며 성만찬을 제정하십니다. 19절과 20절은 성만찬의 본질을 보여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떡을 가져 감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그리고 잔을 들어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새 언약'은 예레미야 31:31의 예언을 성취하는 장면입니다. '세우다'는 헬라어 'διατίθεμαι(diatithemai)'는 유언을 남기거나 유산을 할당하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단순히 흘려지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성립시키는 희생입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이 장면을 교회의 두 가지 성례 중 하나로 이해하며, 믿는 자에게는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은혜가 성만찬을 통해 전달된다고 봅니다.

칼빈은 성만찬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을 신비롭게 먹는 참된 연합의 시간"이라 표현했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성령 안에서 참되게 그리스도를 누리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그 어떤 훈계나 비난보다,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는 방식으로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배신을 예고하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21절) 이 말은 제자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깊어지는 그 순간, 그 자리에 배신자가 있다는 선언은 그들의 심장을 찌르는 칼처럼 다가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함께 있는 역설의 언어입니다. '작정된'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ὡρισμένον(hōrismenon)'으로, '경계 짓다', '정해두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길이지만, 그 길 안에서 인간의 도덕적 선택 역시 평가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장면은 종종 스스로를 돌아보게 합니다. 주님과 함께 앉아 떡을 먹으며 잔을 나누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나의 마음은 주님을 향해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이익과 생각에 갇혀 있는가. 누가는 제자들이 서로 "그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여 서로 묻더라"(23절)고 기록합니다. 이 질문은 비단 유다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의 마음속에 자리한 연약함을 드러냅니다.

결국, 유월절의 식탁은 천국의 은혜와 인간의 타락이 동시에 놓인 자리입니다. 그곳은 예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자리인 동시에, 사람의 죄가 드러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결론

누가복음 22장 1절부터 23절은 단순한 만찬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제자들과 떡을 떼시며,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는 구속의 시작이며, 동시에 인간의 탐욕과 배신이 드러나는 어두운 밤입니다. 하지만 그 밤은 결코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떡과 잔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의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월절 상 위에서 떡을 떼고 잔을 들며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동시에, 우리 안의 유다를 직면해야 합니다. 성만찬의 자리는 자기 성찰의 자리입니다.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은 성찬에 참여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판을 마신다면 그것은 저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으로 그 자리에 선 자에게 성만찬은 하늘의 은혜를 맛보는 복된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떡과 잔 사이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은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우리는 그 음성에 감사와 경외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 떡을 받아들며 고백해야 합니다. 주여, 이 죄인을 위하여 자신을 주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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