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오신 주님, 평안과 사명을 주시다
누가복음 24장 36절부터 53절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직접 나타나시고, 그들을 위로하며 확신을 주신 후, 사명을 부여하시고 승천하시는 장면까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부활 신앙의 완성과 교회의 탄생 전야를 동시에 보여주는 신비로운 장면입니다. 두려움과 의심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은 평안을 선포하시고, 말씀과 떡으로 다시 눈을 열어주신 것처럼 이제는 손과 발을 보여주시며 확신을 주십니다. 그리고 복음이 온 땅에 증언되도록 파송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 모든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부활 신앙이 단지 죽음을 이긴 승리가 아니라, 평안과 사명, 예배와 찬양으로 이어지는 삶의 전환임을 보게 됩니다.
평안을 주시며 의심을 가르치신 주님
제자들이 아직 엠마오에서 돌아온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36절은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기록합니다. ‘친히’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αὐτός(autos)’이며, 강조형으로 실제로 그 예수님 자신이 그들 가운데 서 계심을 나타냅니다. 또한 ‘평강’은 히브리어 ‘샬롬’에 해당하는 헬라어 ‘εἰρήνη(eirēnē)’로, 단순한 안부 인사를 넘어서 하나님의 화평, 곧 모든 혼란과 죄, 죽음이 해소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놀라움과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37절) ‘영’은 헬라어 ‘πνεῦμα(pneuma)’로, 그들은 예수님을 실제 부활하신 몸으로가 아닌, 유령이나 환영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부활 신앙이 단지 기적의 목격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들의 이해와 감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다가오셨고, 그래서 오히려 의심을 낳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이시며 “나인 줄 알라”(39절)고 말씀하십니다. ‘알다’는 헬라어 ‘γινώσκετε(ginōskete)’는 단순한 지적 이해를 넘어서 경험적 확신을 요구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고기 한 토막을 드시며 자신의 실제 몸을 보여주십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단지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몸을 가진 실체적 존재로 살아나셨음을 강조하는 증거입니다.
청교도 존 오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과 영을 모두 회복한 완전한 구원의 모델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이제 더 이상 죽을 수 없는 부활체이지만, 그 육체성은 여전히 제자들에게 친밀함과 확신의 근거가 됩니다. 이는 우리 믿음이 단지 영적 감정이나 상징에 근거하지 않고,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성경의 성취로 해석하신 부활
예수님은 단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십니다. 44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구약 성경 전체(율법, 선지서, 성문서)의 성취가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선언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이루어지다’는 헬라어 ‘πληρωθῆναι(plērōthēnai)’는 충만하게 되다, 성취되다라는 뜻으로, 구약의 예언이 단순히 사실화되었다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가득 차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부활은 하나의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성경의 흐름과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필연적으로 도달해야 할 정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십니다(45절). ‘마음을 열다’는 헬라어 ‘διήνοιξεν(diēnoixen)’은 지각과 인식의 통로를 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 제자들의 눈이 열렸던 것과 연결됩니다.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는 이 과정은 모두 성령의 조명 아래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변화이며, 성경은 단지 문자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해석되는 말씀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며, 그 이름으로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을 말씀하십니다(46-47절).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교회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회개와 죄 사함은 이제 유대인을 넘어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될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복음을 ‘죄인을 위한 유일한 희망의 선포’라 부르며, 회개와 죄 사함을 교회의 생명선이라 했습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8절) 여기서 ‘증인’은 헬라어 ‘μάρτυρες(martyres)’로, 단지 본 것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고난받고 생명까지 바칠 준비가 된 자를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은 이 단어에서 ‘마터(martyr)’라는 영어 단어를 유래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명을 위해 아버지의 약속, 즉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49절). 제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이나 지혜로 복음을 감당할 수 없기에, 위로부터 부어지는 능력을 받아야 했습니다. ‘입히다’는 헬라어 ‘ἐνδύσησθε(endysēsthe)’는 옷을 입다, 덧입히다라는 뜻으로, 성령이 단지 내적 체험이 아니라, 전신을 감싸는 권능이라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베다니 앞까지 인도하시고, 손을 들어 축복하시며 하늘로 올리우십니다(50-51절). 이 장면은 마치 대제사장이 백성을 향해 축복하며 퇴장하는 것과 같은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그분이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사역을 마치고 하늘 성소로 들어가셨음을 상징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강조하며 예수님을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라 부릅니다(히 4:14-16).
그 장면 이후 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52절). 이제 예루살렘은 두려움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장소이며 증언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머뭅니다(53절). 부활과 승천, 그리고 약속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 이 시기는 예배와 기도로 가득 찬 교회의 탄생 직전의 고요한 전야입니다.
마무리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면은 단지 한 복음서의 종결이 아니라, 구속사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문입니다. 무서워 떨던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주님은 그들에게 평안을 주셨고, 의심하는 이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확신을 주셨으며, 말씀을 열어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복음을 온 땅에 전할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장면은 부활 신앙이 단지 과거의 사건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안에서 성취되어야 할 생명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말씀 가운데, 떡을 떼는 자리 가운데, 그리고 예배의 공동체 가운데 임하시며, 우리에게 여전히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는 이 평강을 받은 자로서, 또한 이 평강을 나눌 사명을 받은 자로서 이 땅을 살아갑니다. 아직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이들이 많지만, 부활의 주님은 그들 가운데도 친히 서서, 손과 발을 내미시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인 줄 알라.”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예배하며 기다립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옷 입기까지, 그리고 다시 땅 끝까지 복음을 증언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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